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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취업 22년을 돌아보다 #2 – 하편

이 글은 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파견지는 대기업 은행이였다

일본취업 22년을 돌아보다

첫근무지는 토교미츠비시 은행이였다.
한국인 중에는 일본에서 유학경험이 있는 K씨가 통역을 담당했다. K씨는 업무 통역외에도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인을 위해서 물건을 살 때는 동행을 해서 통역을 해주는게 그의 일이었다.
K씨는 회사에서 한국말 금지, 일본어 단어장 사용 금지를 내렸고 일본인과 대화할때는 반드시 자신을 통해 통역할 것을 종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통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실 그는 IT 분야는 문외한이라서 조금만 전문적인 말을 하면 일본인 담당자에게 제대로 말뜻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데가 자주 있었다.
나는 어차피 일본에서 살려면 일본어를 할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의 동생에게 간단한 일본어 문법책과 일본어 능력시험 1급용 한자 단어책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정해진 근무 시간외의 잔업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대기업 파견이었고, 미쯔비시 은행은 과로사 문제에도 상당히 민감해서인지 사원 휴게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졸린 사람을 위해 30분에서 1시간정도 잠을 잘수있는 침실도 갖주고 있었다.

침실은 업무시간중에는 언제나 누구라도 이용할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방은 약간 어둡게하고 각각 개별침대가 놓여있었다.
입구에서 출입증만 보여주면 개인정보를 기입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고 원하는 시간에 깨워주기까지 했다. 취침실 주변은 조용히 지나가라는 안내판도 있었다.

나도 2번정도 이용했는데 맑은 기분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업무효율도 높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취침실은 인기가 많아서 점심시간만 되면 30석 정도 되는 침실은 꽉찰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6명의 한국인들과 합숙 생활을 했기때문에 해외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을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거의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벙어리 마냥 하루를 보내고 숙소에 도착해서야 한국인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지내니 일본어 회화가 전혀 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가족들도 보고싶고, 친구들도 보고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했다.
해외 이주자라면 누구나 격는 외로움의 시작이였다.

처음배운 일본어

처음배운 일본어

당시에 시부야역에서 내려서 미쯔비시은행 시스템실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지하상가를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같은 음악이 CD판매점에서 들려왔다.
일본어도 모르는터라 어떤 노래인지는 몰랐지만 왠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는 그런 느낌의 노래였다.
뭔가 처량한 나를 위해 들려주는 노래같기도 했고, 잘다니던 회사 때려치고 내가 지금 일본에서 뭔짓을 하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게만드는 그런 느낌을 갖게끔 하는 노래였다.

어느날 용기를 내어서 내 옆의 일본인 동료인 구로다상에게 그 CD를 사고싶은데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단어장을 찾아가면서 물어보았다.
쿠로다상은 내 허접한 일본어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정말 간단한 문장을 알려주었다.
“このCD下さい”
(이 CD 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들어오는 음악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배운 일본어가 바로 “このCD下さい” 이다.
그렇게 구입한 첫 CD는 Kiroro의 첫 싱글 앨범이였다.
Kiroro는 원래 오키나와에서 꽤 알려진 가수였는데 이번에 동경에 데뷰하며 낸 첫 앨범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長い間(오랫동안)란 곡의 가사를 사전을 찾아가면서 해석을 해보니 정말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였다.

첫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長い間、待たせてごめん。また急に仕事が入った。
오랫동안 기다리게해서 미안해. 또다시 급한 일이 들어와버렸어.
いつも一緒にいられなくて寂しい思いをさせたね。
항상 같이 있지 못해서 널 외롭게 했구나.

이어폰을 끼고 가사를 음미하면서 노래를 들으니 옛 추억도 생각나고, 이런 저런 그리움에 사무쳐서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옆에 있던 막내는 갑자기 우는 내가 모습을 보고 무척 당황해 했다.

그렇게 수도없이 Kiroro의 長い間를 반복해서 들었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요곡은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
사랑을 노래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 음악을 좋아 하던터라 노래를 통해 단어도 외우고, 음악도 즐길수 있고, 따라 부르다보면 발음교정도 되지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어를 즐기다

Photo by israel palacio on Unsplash

그후로 나는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무조껀 그 상점으로 가서
“このCD下さい” 라고 말을 했고,
이 말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今、流れている曲のCDをください”
(지금 흘러나오는 곡이 담긴 CD를 주세요.)
라고 말할수 있을 말큼 일본어 활용이 늘기 시작했다.

때로는 카페나 커피숍에서 마음에 드는 음악 흘러나올 때는 점원에게
“すみません。今、流れている曲のタイトルを教えて頂けませんか?”
(죄송하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곡명을 알수 있을까요?)
라는 말까지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가사를 해석해서 모르는 단어는 조그만 단어장에 앞면에는 일본어를, 뒷면에는 한글해석을 달아두고 출퇴근 시간이나, 화장실 갈 때, 잠자기 전에 등의 짜투리가 날 때에는 항상 단어장을 보며 생활했다.
주말에는 노래와 내 발음이 비슷하다고 만족할 때까지 반복해서 따라불렀다.
심지어 백번 넘게 부른 곡도 있다.

당시 우에노 공원 근처 노래방에는 100엔을 추가하면 노래를 CD로 담아주는 곳이 있었는데 주말마다 꼭 이 노래방에 가서 발음 연습을 했었다.
당시 노래방에서 녹음했던 CD가 하나 남아 있어서 남겨본다.
H2O의 “思い出がいっぱい”란 곡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추억이 가득”이란 뜻이다.

한국인과 공동생활이 문제점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정도 집근처의 술을 파는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술도 마셨는데 카라오케 시설도 있어서 이렇게 외운 노래를 즉석에서 부르기도 했다.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내게 주위에 한국인들이 있어서 외로움은 덜했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인들과의 합숙 생활이 생각보다 좋지만은 않았다.

6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다보니 프라이버시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아침이면 화장실과 샤워실 전쟁을 한판 별려야 했고, 밤에는 단체 생활이다보니 같은 시간에 잠에 들어야했다.
뭐 이런 것은 참을수 있었는데 내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파벌이였다.

통역자를 중심으로한 파벌과 나를 데리고 왔던 A씨를 중심으로 한 일본경력자 파벌이 있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취업비자를 가진 나를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압력을 가하기도하고 유혹하기도 했었다.

한국인은 세명만 모여도 편을 나눈다더니 꼭 그런 꼴이였다.
서로 같이 도와가면서 생각이 다르면 좀 양보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왜들 그렇게 나와 생각이 다른사람은 비난하고 억압하고 따돌리고 하는지 같은 한국인이지만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내가 이 두 파벌의 갈등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집을 나가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두달쯤 살고 알게된 것이지만 다섯명이 살던 요코하마 변두리의 그방의 원래 방세는 5만5천엔이였다.
그런데 5명에게 각각 6만엔, 합해서 30만엔을 그 방의 방세로 그 한국인 브로커 회사가 받아 쳐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6만엔 정도면 충분히 동경에서 살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집을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일본어로 말을 하기는 커녕 제대로 듣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This Post Has 3 Comments

  1. non

    녹음본 듣고 깜짝놀랬습니다. 상상이상으로 잘하시네요ㅎㅎ

    1. AzeChan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블로그의 댓글 기능이 켜져있는 걸 잊었네요. 캄사합니다!

  2. Sean

    도쿄 워킹홀리데이 갔을때 추억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저는 처음에 집을 못구하고 가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며칠 지냈었는데 그때 여행객들이랑 같은 방을 썼었습니다.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매일 집 보러 도쿄 변두리를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연재하신것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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